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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묵지/책 더하기 · 리뷰

[그렇지 않다면 석양이 이토록 아름다울 리 없다] 가장 아름다운 장미는 바람에 단련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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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여름. 방글라데시로 다녀온 특별한 여행. 

'인생의 동반자'가 되었다고 자랑할 수 있는 12명의 특별한 인연과 현지에서 만난 k 사무장님 외 한국에서부터 함께 했던 스태프들. 

이들과 함께 한 일주일간의 행복한 동행은, 내가 너무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봉사'라고 말하기 부끄러운 그저 특별한 여행이 되었다. 


한국 사회에서 치열하게 돌아가는 회사의 시간도 잠시 잊고, 

통념적으로 맞추어진 '시간의 틀' 안에서 온전한 삶을 살고 있는 친구들의 육아 이야기로 가득 찬 카톡방도 잠시 잊고, 

반복되는 일상을 완전히 벗어나, 

방글라데시에서 '인연'으로 만난 좋은 사람들과 함께 많이 받고 채우고, 여러 가지를 되짚어 생각하는 시간을 보냈다. 


'제때'라고 말하는 시간을 넘기고, 

한국 사회에서 암묵적으로 약속된 시간보다 한 박자씩 느리게 살고 있는 깜냥인데, 

초조해야 할 이 나이에 아직도 철이 들지 않았나 보다. 

올여름 채워진 의미들로 또 당분간은 철딱서니 없게 살 것만 같다...




" 취미가 뭐예요? "

" 안 어울리게 책 읽는 걸 좋아하고, 글을 쓰는 걸 좋아해요. "

" 글 잘 쓰실 것 같아요.. "

" 좋아하는데 아직 많이 부족해요. 글을 잘 쓰고 싶어요. "


며칠 후, 도착한 메시지.


" 자고 있겠죠...

  내가 왜 Liah 님이 글을 잘 쓸 거 같다고 생각했냐하면...

  20대 때 마루야마 겐지라는 작가가 쓴 소설가의 각오라는 자전적 수필이 있었는데 

  거기 나오는 작가의 눈빛이 읽혀졌었어요.


  내가 사람 보는 눈이 그렇게 틀리지는 않는데 그 눈빛이 계속 생각납니다.


  멀리까지 찾아와주고 나눠주고 같이 웃다 울다 가줘서 너무 감사했어요.

  '인연'은 운이고 업이라 했죠? 인연에 따라 또 계속 봐요..


  그대들과의 추억이 계속 아른거립니다 ^^ "


그리하여 읽기 시작한 마루야마 겐지의 책. 그중 첫 번째로 손이 간 책이 <그렇지 않다면 석양이 이토록 아름다울 리 없다>였다. 과연 그의 매서운 눈빛에 나도 매료되었는데, 내 눈빛이 이렇게 읽혔는지 그저 영광스럽기만 했다. '마루야마 겐지' 살아 숨 쉬는 것 같은 문장 하나하나에 그의 호흡이 깃들어 있었다. 내가 왜 여태 이런 거장을 몰랐을까... 읽는 것이 취미라고 자랑스럽게 말하고 다닌 것이 부끄러울 만치 문학 무지자였다. 한국어로 번역된 그의 책이 십수 권에 이르므로 앞으로 몇 달간은 마루야마 겐지의 문장에 푹 빠져 지낼 것 같다. k 사무장님, 감사합니다! : )



■  본문 중에서


# 사적인 소우주 - 10p.

그러나 일 년 내내 이 땅을 떠나지도 않고 여행을 가는 일도 없이, 마치 정원의 노예처럼 살고 있는 나 같은 사람이 남의 땅의 절기 변화나 개화 상황 등을 알 길은 없다. 정원에 만개의 순간이 반짝 찾아올 때마다 '이 세상 봄의 중심은 역시 이곳이 틀림없어.'라는 오만한 생각에 빠져 혼자 흐뭇해 하는 것이다.

전적으로 찰나에 불과한 만개의 순간을 위해, 다른 계절 대부분의 하루하루를 평범하기 그지 없는 편집증적 분투를 하면서 보낸다. 그 덕분에 정원의 식물들이 불꽃놀이 장치에서 솟아오르는 불꽃 혹은 시한폭탄처럼 일제히 꽃을 피워 아름다움을 겨루는 색채와 향기의 제전이 계속되면, 술에 취한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기분에 푹 빠져 버린다. 붕 뜨고, 두근두근 안절부절 못한다.



# 버리 수 없다면 정원사는 금물 - 15p.

대개는 여성에게 그런 경향이 있다. 아까워, 추억이 담겨 있잖아 등등의 이유로 계속 모으다 보면, 언젠가는 전부를 잃어버리는 지경에 이르고, 문득 깨달았을 때는 자신조차도 누더기가 되어 있다. 폐인 같은 몰골로, 거친 무덤 같은 땅에 멍하니 서있게 되는 것이다.

요약하자면 우유부단해 대담하게 버리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정원 가꾸기가 어울리지 않는다. 가드닝 같은 것이 한때 크게 유행했다가 이제는 완전히 시들해져 버린 것은, 손에 들어온 꽃들을 품은 채 하나도 놓지 않으려는 성격의 사람이 너무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 사철 내내 꽃을 피울 순 없다 - 24p.

인생에서 겨울은 좌절의 기간이다. 식물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이것도 새로운 비약을 위한 중요한 조건이다. 개화, 개화의 연속인 식물이 존재하지 않듯, 성공, 성공의 연속인 인생 또한 없다. 좌절과 실패는 사람을 고독의 지옥에 던져 넣는다. 그 지옥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 사람 중에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도 있지만, 맞서 싸워 자신에 의존하는 힘을 기른 사람은 재생 부활의 기회를 얻는다. 그뿐 아니라 회복을 넘어서는 무언가를 받게 돼, 이전보다 한 단계 더 굳건해진 생명으로 훨씬 더 멋진 성공을 안게 되는 것이다.

(중략)

뛰어나게 대담하지도 못하고, 세상의 상식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해 수치스러움에 옥죄여 있는 사람들이 목숨을 존속시킬 수 있는 열쇠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 만한 일이나 취미다. 하지만 그 열쇠를 가진 이라도 겨울에 발이 걸려 넘어지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우연한 계기로 고독의 마왕에 허를 찔려 살 가치가 없다는 답을 선뜻 내놓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다. 병, 실연, 실직, 불합격 통지서, 배신, 이별, 사별, 날벼락 같은 빚과 같은 명백한 이유는 물론, 별 이유 같지 않은 이유로 인해 순식간에 우울해져 어느 날 느닷없이 삶의 모든 것을 팽개치는 사람도 있다. 그런 비극적인 소식을 들을 때마다 나도 모르게 '아, 또한 목숨이 겨울에 죽음을 당하고 만 건가.'라고 중얼거린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봄이 찾아왔는데도 전혀 싹을 틔우지 않는 식물을 발견할 때 역시, 겨울에게 살해당한 것이라는, 즉 초목에게도 자살이 있을 수 있다는 비약한 심한 생각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 만만한 생은 없다 - 39p.

동물의 수컷은 크게 두부류로 나눌 수 있다. 가족의 삶을 방해하는 수컷과 가족을 제대로 지키려는 수컷. 인간의 수컷 역시 이 두 가지로 분류된다. 하지만 사람의 암컷은 자칫하면 양자를 구분하기를 게을리 하기 쉽다. 연애, 결혼, 행복한 가정이란 도식을 한 번 가슴에 그려 버리면, 교제하는 수컷의 본성을 헤아리려 하지 않고 무작정 자신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이런 착각 속에서 여러 해를 보낸 뒤에야 쓰라림을 맛보게 된다.

가정에 잘 스며드는 남자를 고르기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설령 그런 남자가 있더라도 여자 쪽에서 볼 때는 거의 이성으로서 매력이 느껴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만나도 무시하게 되고, 결국 스쳐 가는 관계로 끝나 버린다. 또 가정에 제대로 머무는 남자라도 아내를 어머니 대신으로 여기는 이들이 늘고 있어, 그런 남자에게 모성애를 자극 받아 잘못된 판단을 내렸다가는 임신도 하기 전부터 성가신 아이를 가져 버린 꼴이 돼 아연 실색하는 여자들도 드물지 않다.



# 반짝반짝 빛나는 삶이 두 손을 비비며 다가온다 - 69p.

정원에 나갈 때마다 심장이 두방망이질 치며 혼자 승리한 심정이 된다. 우주를 지휘하는 실권자라도 된 듯한 착각을 즐기며 하찮은 자신의 목숨만을 벗 삼아 살아가는 다른 이들을 비웃는다. 그렇게 오만한 나의 옆을 거짓 없는 진짜 삶이 스쳐 간다. 와해되기 시작했던 영혼이 다시 조각을 맞추기 시작한다. 자기혐오를 짊어진 마음이 엽록소에 녹아들거나 알찬 양분이 되어 모근에 흡수돼 간다. 반짝반짝 빛나는 삶이 두 손을 비비며 이쪽으로 다가온다.



# 전진만이 예술의 진수에 다가가는 법 - 100p.

우선 말해 두자면, 나는 파괴자가 아니다. 가치가 있을 것 같은 일은 철저히 해야만 하는 타입으로, 사실 그렇게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렇게밖에 살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나 자신을 창조하는 것이라고 확신한다. 소설이든 정원 가꾸기든 나는 그것들을 통해 본의 아니게 이 땅에 정착하고 있는 나 자신을 찾고, 존재 이유를 탐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게 아니면 마음의 갈증, 이성의 졸음, 인간 정신에 대한 뿌리 깊은 불만에 시달리고 있는 자아로부터 벗어나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 단풍에 취한 하루로도 족하다 - 109p.

살림 냄새 나는 생활 속으로 서슴없이 발을 들이는 위급한 문제들. 여러 모습으로 존재하는 자신 사이에서 생겨나는 싸움. 점점 화석화되고 있는 사는 보람. 혼자서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비장한 각오. 제압당해 부서져 버린 인생 그 자체. 행복해지고 싶어 애타는 심정. 아직도 갈망해 마지않는 향락. 이미 미래를 기대할 수 없게 된 피할 수 없는 궁지(窮地). 남들보다 강해지려 열심히 노력했는데도 패배 일로를 걷는 남은 인생.



# 몸으로 깨달은 것은 평생 남는다 - 120p.

무엇이든 겉만 봐서는 본질에 가까워질 수 없다. 직접 손으로 만짐으로써 처음으로 실태를 파악할 수 있다. 엄청나게 많은 책을 읽고, 컴퓨터가 보여 주는 정보의 바다를 헤엄쳐도 실제 체험이 빠진 지식은 결국 자신의 것이 되지 못한다. 하물며 확고한 진리에 도달하는 것은 몽상 중의 몽상이다. 몸으로 깨달은 것은 평생 남지만 머리로만 얻은 확신은 금방 의문에 흔들리고 부정되어 버린다.

그것은 읽을 수는 있지만 쓸 수 없는 것과 비슷할지도 모른다. 읽는 것은 머리만으로도 충분하지만 쓰는 것은 정원 일처럼 육체적 노동이 동반된다. 그런데 실제로는 읽는 것과 쓰는 것의 결정적인 차이를 가벼이 여기는 사람이 너무 많다. 양쪽 모두 동일한 지적인 행위로 해석되고, 그러한 오해에서 생긴 낙차에 불필요한 고뇌를 강요당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읽는 것은 감상이고, 쓰는 것은 연주다. 연주를 하려면 당연히 거듭 연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몸에 익히는 노력을 오랫동안 참고 계속하지 않으면 안 된다. 글을 써야 비로소 자신이 보려던 것이 선명해진다. 몸을 쓴 덕에 받을 수 있는 선물인 것이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오체를 통해 현실을 계속 접하는 자세다. 그것 없이 태만한 선택만을 하면 어설픈 정보와 싸구려 지식에 휘둘려 떠밀려 간다. 언젠가는 자신을 잃고 현실의 벽에 부딪혀 나가떨어지는 나약한 인간이 되고 만다. 그리고 곧 도망칠 곳도 잃고, 인생이 교착상태에 빠져 패기를 잃는다. 마음뿐 아니라 영혼까지도 기운을 잃고 축 처지게 된다.

(중략)

생각대로 되지 않는 것투성이, 불쾌한 것투성이, 지긋지긋한 것투성이. 그렇기 때문에 사는 것이 재미있다고 발상을 전환하는 데 성공하지 않으면 진흙으로 만든 인형 같은 일생을 보낼 수밖에 없다.

현실과의 투쟁을 포기하는 생물은 인간 외에 없다. 인간은 문명의 어중간한 발달로 인해 덧없는 행복감에 현혹되고, 불특정 다수의 삶에 자신을 과도하게 맞추려 한다. 그리고 유년기부터 청춘기에 걸친 부모와 사회의 과보호에 의해 자립하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을지 모른다는 물러터진 환상에 젖어 있다. 정원의 초목이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치부하면 그뿐이다. 하지만 인간은 실제 사회라는 정글에서 살아남지 않으면 안 되므로 그야말로 위기다.



# 가장 아름다운 장미는 바람에 단련된 것이다 - 130p.

장미가 상징하는 것은 열정이고 희망이며, 사랑이고 도취다. 반면 정원에 몰아치는 바람이 상징하는 것은 대체로 장미와는 정반대의 것이리라. 장미와 바람, 그 둘은 바로 삶 자체를 상징한다. 이 둘의 싸움이야말로 현세를 넘어선 생명 본연의 자세를 시사하는 것이다. 이 쓰라린 세상이 단순히 우연과 인연의 연속에 불과하다고, 혹은 망각의 도움 없이 살 수 없는 세상이라고, 혹은 자기 자신을 저주할 수밖에 없는 끔찍한 지옥이라고 단정 하기 전에, 좋아하는 장미 한 송이를 생각해 보자. 때와 장소에 엄격히 제약 받는 그 장미가 어떻게 가혹한 바람을 견디며 꽃을 피우는지를.



■ 차례


 1월_  버릴 수 없다면 정원사가 되지 마라

 2월_  사철 내내 꽃을 피울 수는 없다

 3월_  한 마리 새도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별별 일을 다 겪는다

 4월_  성장하고 싶다면 가지를 쳐내라

 5월_  봄의 들놀이가 수만 권을 읽는 것보다 낫다

 6월_  존재하는 것들의 유일한 명제는 오로지 살아남는 것이다

 7월_  꽃을 돌아보지 마라

 8월_  당신을 타락시키는 유혹은 언제나 당신으로부터 시작된다

 9월_  예술의 진정한 힘의 원천은 생명체 간의 투쟁 그 자체다

10월_  단풍에 취한 찰나로도 충분하다

11월_  현실과의 투쟁을 피할 수 있는 생명체는 없다

12월_  가장 아름다운 장미는 바람에 단련된 것이다

후기_  무죄 선고를 받은 피고인처럼



<그렇지 않다면 석양이 이토록 아름다울 리 없다>

마루야마 겐지 지음, 이영희 옮김

바다출판사, 2015



그렇지 않다면 석양이 이토록 아름다울 리 없다
국내도서
저자 : 마루야마 겐지 / 이영희역
출판 : 바다출판사 2015.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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