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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묵지/추억의 책장 · 메모

[라면을 끓이며] 먹고산다는 것의 안쪽을 들여다보는 비애(悲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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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볼만한 이유있는 글 : [문화]김훈 유감: "라면을 끓이며"에 대한, 이유 있는 험담

http://www.ddanzi.com/ddanziNews/69327522




# 라면을 끓이며

- 13~14p.

맛은 화학적 실체라기보다는 정서적 현상이다. 맛은 우리가 그것을 입안에서 누리고 있을 때만 유효한 현실이다. 그외 모든 시간 속에서 맛은 그리움으로 변해서 사람들의 뼈와 살과 정서의 깊은 곳에서 태아처럼 잠들어 있다. 맛은 추억이나 결핍으로 존재한다. 시장기는 얼마나 많은 추억을 환기시키는가. 그 영육(靈肉) 복합체는 유년의 천막학교에서 미군들한테 얻어먹은 레이션 ration(전투식량)의 맛까지도 흔들어 깨운다. 이 궁상맞음을 비웃어서는 안 된다. 당신들도 다 마찬가지다. 한 달 벌어 한 달 살아가는 사람이 거리에서 돈을 주고 사먹을 수 있는 음식은 뻔하다.

라면이나 짜장면은 장복을 하게 되면 인이 박인다. 그 안쓰러운 것들을 한동안 먹지 않으면, 배가 고프지 않아도 공연히 먹고 싶어진다. 인은 혓바닥이 아니라 정서 위에 찍힌 문양과도 같다. 세상은 짜장면처럼 어둡고 퀴퀴하거나, 라면처럼 부박(浮薄)하리라는 체념의 편안한 마음의 깊은 곳을 쓰다듬는다.


- 28~31p.

사실, 이 글은 오랜 세월 동안 라면을 끓이고 또 먹어온 나의 라면 조리법을 소개하려고 시작했는데, 도입부가 좀 길어졌다. 이제부터가 본론이다. 라면 포장지에는 끓는 물에 면과 분말수프를 넣고 나서 4분 30초 정도 더 끓이라고 적혀 있지만, 나는 센 불로 3분 이내로 끓여낸다. 가정에서 쓰는 도시가스로는 어렵고, 야외용 휘발유 버너의 불꽃을 최대한으로 크게 해서 끓이면 면발이 붇지 않고 탱탱한 탄력을 유지한다. 면이 불으면, 국물이 투박하고 걸쭉해져서 면뿐 아니라 국물까지 망친다. 그러나 실내에서 휘발유 버너를 쓰는 일은 위험해서, 나를 따라 하면 안 된다(어린아이 조심!).

또 물은 550ml(3컵) 정도를 끓이라고 포장지에 적혀 있지만, 나는 700ml(4컵) 정도를 끓인다. 물이 넉넉해야 라면이 편안하게 끓는다. 수영장이 넓어야 헤엄치기 편한 것과 같다. 라면이 끓을 때, 면발이 서로 엉키지 않아야 하는데, 물이 넉넉하고 화산 터지듯 펄펄 끓어야 면발이 깊이, 또 삽시간에 익는다. 익으면서 망가지지 않는다.

라면을 끓일 때, 가장 중요한 점은 국물과 면의 조화를 이루는 일이다. 이것은 쉽지 않다. 라면 국물은 반 이상은 남기게 돼 있다. 그러나 그 국물이 면에 스며들어 맛을 결정한다. 국물의 맛은 면에 스며들어야 하고, 면의 밀가루 맛은 국물 속으로 배어나오지 않아야 한다. 이것은 고난도 기술이다. 센 불을 쓰면, 대체로 실패하지 않는다. 식성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나는 분말수프를 3분의 2만 넣는다.

나는 라면을 조리할 때 대파를 기본으로 삼고, 분말수프를 보조로 삼는다. 대파는 검지손가락만한 것 10개 정도를 하얀 밑동만을 잘라서 세로로 길게 쪼개놓았다가 라면이 2분쯤 끓었을 때 넣는다. 처음부터 대파를 넣고 끓이면 파가 곯고 풀어져서 먹을 수가 없이 된다. 파를 넣은 다음에는 긴 나무젓가락으로 라면을 한 번 휘젓고 빨리 뚜껑을 덮어서 1분~1분 30초쯤 더 끓인다. 파는 라면 국물에 천연의 단맛과 청량감을 불어넣어주고, 그 맛을 면에 스미게 한다. 파가 우러난 국물은 달고도 쌉쌀하다. 파는 라면 맛의 공업적 질감을 순화시킨다.

그다음에는 달걀을 넣는다. 달걀을 미리 깨서 흰자와 노른자를 섞어놓아야 한다. 불을 끄고, 끓기가 잦아들고 난 뒤에 달걀을 넣어야 한다. 끓을 때 달걀을 넣으면 달걀이 굳어져서 국물과 섞이지 않고 겉돈다. 달걀을 넣은 다음에 젓가락으로 저으면 달걀이 반쯤 익은 상태에서 국물 속으로 스민다. 이 동작을 신속히 끝내고 빨리 뚜껑을 닫아서 30초쯤 기다렸다가 먹는다. 파가 우러난 국물에 달걀이 스며들면 파의 서늘한 청량감이 달걀의 부드러움과 섞여서, 라면은 인간 가까이 다가와 덜 쓸쓸하게 먹을 만하고 견딜 만한 음식이 된다.

나는 이 모든 것을 스승 없이 혼자서, 수많은 실험과 실패를 거듭하며 배웠다. 레시피를 읽고 따라 한 것이 아니다. 앞으로도 새롭게 열어나가야 할, 전인미답의 경지가 보이기는 하지만 라면 조리법 개발은 이제 그만하려 한다. 

나는 라면을 먹을 때 내가 가진 그릇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비싼 도자기 그릇에 담아서, 깨끗하고 날씬한 일회용 나무 젓가락으로 먹는다.

라면을 끓일 때, 나는 미군에게 얻어먹던 내 유년의 레이션 맛과 초콜릿의 맛을 생각한다. 라면을 끓일 때 나는 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양계장의 닭들과 사지를 결박당한 과수원의 포도나무 사과나무 배나무 들과 양식장에서 들끓는 물고기들을 생각한다. 라면을 끓일 때 나는 사람들의 목구멍을 찌르며 넘어가는 36억 개 라면의 그 분말수프의 맛을 생각한다. 파와 계란의 힘으로, 조금은 순해진 내 라면 국물의 맛을 36억 개의 라면에게 전하고 싶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한눈을 팔다가 라면이 끓어 넘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라면의 길은 아직도 멀다.




# 광야를 달리는 말

 - 34p.

우리 남매들이 더 이상 울지 세월에도, 새로 들어온 무덤에서는 사람들이 울었다. 이제는 울지 않는 자들과 새로 울기 시작한 자들 사이에서 봄마다 풀들은 푸르게 빛났다.


나는 내 아버지와 그의 시대를 긴 글로 써보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 나의 시도는 여러 번 실패하였고 지금은 파지만 쌓여 있지만, 새가 알을 품듯이 나는 그 생각을 품고 있다.

내가 실패를 거듭하는 까닭을 나는 안다. 내 아버지의 삶의 파탄과 광기, 그의 꿈과 울분과 절망의 하중을 내가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신산한 기억들을 나는 겨우 몇 자 쓰려 한다. 아버지는 63년을 살고 기세(棄世)하였다. 나는 이제 아버지보다 더 오래 살고 있다. 나는 젊은 날의 내 아버지가 때때로 내 가엾은 아들처럼 느껴진다.


- 37p.

내 아버지는 공회전과 원점회귀를 거듭하는 한국 현대사의 황무지에 맨몸을 갈았다. 그는 비명을 지르고 좌충우돌하면서 그 황무지를 건너갔다. 건너가지 못하고, 그 돌밭에 몸을 갈면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생업은 신문기자이거나 소설가였는데, 밥을 온전히 먹을 수 있는 노동은 아니었다.

아버지는 당대 현시 속에서 자신의 좌표를 설정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하해와 같은 억겁의 술을 마셨다. 아버지는 식민지의 종로 뒷골목에서 술을 배웠다. 아버지는 망명지 길림에서 마셨고 상해에서 마셨고 천진(天津)에서 마셨고 북경에서 마셨고 양자강 남쪽의 포구마을들을 떠돌아다니면서 마셨다. 아버지는 해방된 조국에 돌아와서 그 막막한 잡초밭에서 마셨고 좌우의 피 튀김 속에서 마셨고 전선(戰線)이 낙동강까지 밀려내려온 피난지 부산에서 마셨고 환도 후에 잿더미가 된 명동의 폐허에서 마셨고 이승만 치하에서 자유당의 무능과 부패를 저주하며 마셨고 박정희 소장이 대통령이 되는 과정을 보면서 마셨다.

그는 이승만 정권, 장면 정권, 박정희 정권을 향해 활화산과도 같은 저주를 뿜어냈다. 폐지 수집하듯이 매절원고를 몰아가서 원고료를 잘라먹는 출판업자들과, 외상값을 독촉하는 술집 주인들, 호적초본을 떼어주면서 턱으로 사물을 가리키는 구청 직원들과, 껌을 씹으며 병실에 들어오는 간호원들을 그는 이를 갈며 증오했다.





# 바다 – 58p.

물곰은 진화를 거부한 물고기처럼 보였다. 물곰의 표정과 몸짓은 그 종족의 최초 개체가 바다 속에 생겨난 고생대의 질감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그 종족은 역사나 시간에 속해 있지 않았다. 저것을 내가 먹었구나, 저 아득한 수억만년의 표정과 질감을 끓여서 국물로 마셨구나……

어느 날, 식당 수족관에 어린 물곰이 잡혀와 있었다. 물곰은 어린 시절부터 늙음의 표정을 지니고 있었다. 물곰은 태어날 때부터 수억만 년의 늙음을 이미 생명의 바탕에 깔고 있었다. 아마도 물곰은 공격본능이나 방어본능으로부터 얼마쯤은 벗어나 있는 물고기인 듯싶었다. 저러한 늙음, 흐느적거림, 시간으로부터의 자유가 물곰의 살과 뼈에 녹아들어서 그것을 끓인 국물이 인간을 위로하는 것이려니 싶었다. 어린 물곰은 이미 수억만 년 늙어 있었고, 늙었다기보다는, 그 늙음 위에서 새로 태어나고 있었다.



# 밥 1

– 70~71p.

모든 ‘먹는’ 동작에는 비애가 있다. 모든 포유류는 어금니로 음식물을 으깨서 먹게 되어 있다. 지하철 계단에 쭈그리고 앉아서 짜장면을 먹는 걸인의 동작과 고급 레스토랑에서 냅킨을 두르고 거위간을 먹는 귀부인의 동작은 같다. 그래서 밥의 질감은 운명과도 같은 정서를 형성한다.

전기밥솥 속에서 밥이 익어가는 그 평화롭고 비린 향기에 나는 한평생 목이 메었다. 이 비애가 가족들을 한울타리 안으로 불러모으고 사람들을 거리로 내몰아 밥을 벌게 한다. 밥에는 대책이 없다. 한두 끼를 먹어서 되는 일이 아니라, 죽는 날까지 때가 되면 반드시 먹어야 한다. 이것이 밥이다. 이것이 진저리나는 밥이라는 것이다.

밥벌이도 힘들지만, 벌어놓은 밥을 넘기기도 그에 못지 않게 힘들다. 술이 덜 깬 아침에, 골은 깨어지고 속은 뒤집히는데, 다시 거리로 나아가기 위해 김 나는 밥을 마주하고 있으면 밥의 슬픔은 절정을 이룬다. 이것을 넘겨야 다시 이것을 벌 수가 있는데, 속이 쓰려서 이것을 넘길 수가 없다. 이것을 벌기 위하여 이것을 넘길 수가 없도록 몸을 부려야 한다면 대체 나는 왜 이것을 이토록 필사적으로 벌어야 하는가. 그러니 이것을 어찌하면 좋은가. 대책은 없는 것이다.


- 73p.

이 세상의 근로감독관들아, 제발 인간을 향해서 열심히 일하라고 조져대지 말아달라. 제발 이제는 좀 쉬라고 말해달라. 이미 곤죽이 되도록 열심히 했다. 나는 밥벌이를 지겨워하는 모든 사람들의 친구가 되고 싶다. 친구들아, 밥벌이에는 아무 대책이 없다. 그러나 우리들의 목표는 끝끝내 밥벌이가 아니다. 이걸 잊지 말고 또다시 각자 핸드폰을 차고 거리로 나가서 꾸역꾸역 밥을 벌자. 무슨 도리 있겠는가. 아무 도리 없다.



# 목수

– 127~128p.

나는 놀기를 좋아하고 일하기를 싫어한다. 나는 일이라면 딱 질색이다. 내가 일을 싫어하는 까닭은 분명하고도 정당하다. 일은 나를 나 자신으로부터 소외시키기 때문이다. 부지런을 떨수록 나는 점점 더 나로부터 멀어져서, 낯선 사물이 되어간다. 일은 내 몸을 나로부터 분리시킨다. 일이 몸에서 겉돌아서 일 따로 몸 따로가 될 때, 나는 불안하다. 나는 오랜세월 동안 소외된 노동으로 밥을 먹었다.

나는 이제 아무데도 붙여주는 곳이 없고 기웃거릴 곳도 없어서 혼자 들어앉아 있다. 또 막 무는 개들이 너무 많이 돌아다녀서 대문 밖에 나가지 못한다. 요즘 나의 일이란 하루에 그저 두어 줄씩 작문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때때로 그나마도 하고 싶지가 않다.

글이란 아무리 세상 없이 잘나서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몇줄이라 하더라도 그 물적 바탕은 훈민정음 스물네 글자를 이리저리 꿰어맞추고 붙였다 떼었다 하는 것이다. 그러니 글을 쓸 때 오른손엔 연필, 왼손엔 지우개를 쥔 내 몸은 부지할 곳이 없고 숨쉴 공기가 모자란다. 다 큰 사내가 어찌 연필과 지우개만으로 그 몸의 일을 넉넉히 할 수가 있겠는가. 나는 이렇게는 도저히 못한다.


- 130p.

공사중인 집의 처마 끝에 매달려 못질을 하는 젊은 목수는 그 아름다움으로 나를 주눅들게 한다. 그러나 누구의 삶인들 고달프고 스산하지 않겠는가. 나무통이 좁아서 뿌리가 비어져나온 옥수수를 들여다보면서 나는 새로운 슬픔으로 지나간 슬픔을 위로한다. 옥수수잎에서, 먼 바람 소리가 들린다. 놀다보니 봄은 다 갔고, 내 사랑하는 젊은 목수들은 집을 다 짓고 어디론지 가고 없다.



# 목숨 1 – 137~138p.

행복에 대한 추억은 별 것 없다. 다만 나날들이 무사하기를 빈다. 무사한 날들이 쌓여서 행복이 되든지 불행이 되든지, 그저 하루하루가 별 탈 없기를 바란다. 순하게 세월이 흘러서 또 그렇게 순하게 세월이 끝나기를 바란다.

죽을 생각 하면 아직은 두렵다. 죽으면 우리들의 사랑이나 열정도 모두 소멸하는 것일까. 아마 그럴 것이다.

삶은 살아 있는 동안만의 삶일 뿐이다. 죽어서 소멸하는 사랑과 열정이 어째서 살아 있는 동안의 삶을 들볶아대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그 사랑과 열정으로 더불어 하루하루가 무사할 수 있다는 것은 큰 복은 아니지만, 그래도 복 받은 일이다.

사람의 죽음을 가까이서 지켜본 일이 있었다.연기가 빠져 나가듯이, 생명은 가뭇없이 빠져나갔다. 생명은 본시 연기나 바람 같은 기체가 아니었을까. 생명이 빠져나간 육신은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고, 죽어가는 육신의 눈을 떠서 마지막 이승을 한동안 바라보더니 눈을 감았다. 그의 눈동자에 비친 이승의 마지막 풍경은 어떠한 것이었을까.

아직 살아 있는 나는 죽어가는 그를 바라보았고, 그는 마지막 망막의 기능으로 아직 살아 있는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의 마지막 망막에 비친 살아 있는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마지막 망망에 비친 살아 있는 나의 모습은 어떠한 것이었을까. 죽어가는 그와 마찬가지로, 한줌의 공기나 바람은 아니었을까.



# 세월호

 – 158p.

내가 얼마 전에 진도 팽목항에 가서 눈물도 말라버린 유가족들과 함께 바다를 바라보니 부르는 소리는 수평선 너머로 퍼져가는데 배 빠진 자리는 흔적이 없고, 바다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


- 164~166p.

2014년 4월 16일의 참사 이후로 사태를 바라보는 이 사회의 시각은 발작적인 분열을 일으키며 파탄되었다. 슬픔과 분노를 온전히 간직해서 미래를 지향하는 동력으로 가동시켜야 한다는 시각과 그 슬픔과 분노를 매우 퇴행적이고 소모적인 것으로 여겨 혐오하는 시각이 교차했다. 거칠게 말하자면 4월, 5월까지는 전자의 시각이 우세했으나 6월 4일 지방선거에서 여당이 적지 않은 재미를 보고, 이어 7월 30일 재보선에서 여당이 압승하자, 후자의 시각이 주류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슬픔과 분노에 오랫동안 매달려 있는 것은 경제 살리기에 해롭다는 것이 그 혐오감의 주된 논리였다. 세월호에서 놓친 골든타임이 경제회복의 골든타임으로 살아났고 거기에 이념의 날라리들이 들러붙기 시작했다. 사실 4.16 참사 이후에 경기는 장기침체에 빠졌고, 정부의 부양책은 힘을 쓰지 못했다. 모두들 슬프고 분하면 경기는 침체되는 것이니까. 슬픔과 분노가 경기침체의 원인이라는 말도 결국은 동어반복이다. 어찌 헌옷을 벗듯이, 헌신짝을 벗어버리듯이 마음의 일을 벗어던질 수 있을 것인가. 돈 많고 권세 높은 자들이 큰 죄를 저질러도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 형량을 줄여서 선고하고, 형기중에도 특별사면, 일반사면, 집행정지, 가석방, 병보석으로 풀어주는 무법천지를 나는 자유당 때부터 보아왔고 이 무법천지는 모두 합법적으로 이루어졌다. 죄형법정주의는 무너졌고 경제는 합리적이고 규범적인 토대를 상실했다. 재벌의 불법을 용인해야 경제가 살아나고, 정당한 슬픔과 부노를 벗어던져야만 먹고 살기 좋은 세상이 된다는 말은 시장의 논리도 아니고 분배의 정의도 아니다. 그것은 정치적인 속임수일 뿐이다. 법치주의가 살아 있어도 법이 밥을 먹여줄 리는 없고, 밥은 각자 알아서 벌어먹어야 하는 것인데, 법치주의를 포기해야만 밥을 벌어먹기가 수월해진다면 이 가엾은 중생들의 밥은 얼마나 굴욕적인 것인가.


- 167~168p.

4.16의 슬픔과 분노는 전혀 정치적인 것이 아니었지만 결국은 정치의 악다구니 속으로 편입되었고, 내 편과 내 편이 아닌 편으로 갈라져서 치고받게 되었는데, 세종로에서 단식을 이어가던 유가족들 옆에서 먹성 좋아 보이는 청년들이 통닭과 짜장면을 먹어대고, 또 국회의원 명함을 내미는 웬 여성이 대리운전기사를 폭행하는 짓에 연루됨으로써 이 악다구니와 악다구니에 편승하는 또다른 악다구니들이 온 나라에 넘쳤다. 슬픔과 분노의 온전한 모습은 파괴되었고 유민이의 젖은 6만 원의 의미는 실종되었다. 그 슬픔과 분노는 특별히 재수가 없어서 끔찍한 재앙을 당한 소수자의 불운으로 자리매겨졌다. 그 소수의 고통을 사회적으로 표출하는 것은 다수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것이고 다수가 먹고 사는 일에 해로운 결과가 된다고 힘센 목청을 가진 언설의 기관들이 힘을 합쳐서 소리질렀다. 소리질러서 낙인찍었고, 구석으로 몰아붙였다. 그렇게 해서 4.16의 슬픔과 분노는 특별히 재수없어서 재난을 당한 소수자의 것, 우는 자들만의 것, 루저들만의 것으로 밀려났다.


- 170p.

나는 단지, 겨우 쓴다.

늙은이의 춘수(春瘦)는 어수선하다.

새벽의 꿈에, 배 빠진 맹골수로에도 4월이 와서 봄빛이 내리는 하얀 손목들이 새순처럼 올라와서 대통령의 한복 치맛자락을 붙잡고, 친박 비박 친노 비노 장관 차관 이사관 들의 바짓가랑이에 매달려 우는데, 바짓가랑이들은 그 매달리는 손목들을 뿌리치고 있었다. 그 바다는 국가가 없고 정부가 없고 인기척이 없는 무인지경이었다. 손목들은 사람 사는 육지를 손짓하다가 손목들끼리 끌어안고 울었다.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기진하였다.



# 돈 2 – 185p.

나는 천 원짜리 지폐에 그려진 퇴계의 초상을 들여다볼 때마다 기호와 실물 사이에서 길을 잃는다. 이러니 돈 벌 생각은 아예 못한다. 얼마 전에 마누라가 신용카드라는 것을 만들어주었다. 이것은 경이로운 물건이었다. 기계에 넣기만 하면 돈이 촤르르촤르르 쏟아져나왔다. 돈과 관련된 삶의 고통이 모두 해결되었구나 싶었다. 은행마다 우체국마다 편의점마다 돈 쏟아지는 기계가 설치되어 있었다. 돈은 촤르르촤르르 겁도 없이 쏟아져나왔다. 다시 귀기울이니, 이 촤르르 소리는 실물과 기호 사이의 나락에서 울리는 소리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신용카드를 너무 많이 써서 패가망신하고 있다. 기호와 실물 사이에는 지옥이 있고, 이 지옥에 떨어지면 헤어날 길이 없다. 촤르르촤르르 돈은 쏟아지고, 지옥문은 자꾸 넒어진다. 퇴계 선생께 거듭 죄송하다.



# 바다의 기별

– 223p.

모든, 닿을 수 없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품을 수 없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만져지지 않는 것들과 불러지지 않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건널 수 없는 것들과 모든, 다가오지 않는 것들을 기어이 사랑이라고 부른다.


- 230~231.

모든, 닿을 수 없는 것들과 모든, 건널 수 없는 것들과 모든, 다가오지 않는 것들과 모든, 참혹한 결핍들을 모조리 사랑이라고 부른다. 기어이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 여자 1 – 235p.

여자들은 저 익명의 여성성을 자신의 실존에만 고유한 개별적 상황으로 바꾸어놓기 위하여 수만 년의 세월을 거울 속에 집중했다. 그것은 무덤 속에서조차 단념할 수 없는 여자들의 싸움이다. 지금 이 싸움은 그다지 성공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나의 존재가 언제나 보여져야 하고 언제나 휘발되어서 밖으로 번져나가야 한다면, 그런 삶의 하중을 견뎌내기란 어려울 것 같다. 언제나 휘발되어야 한다면, 그 휘발의 결과가 개별성의 자유일 수가 있을까. 그러나 그런 의문은 화장을 향한 여자들의 집중된 열정 앞에서 완전히 무력하다.



# 여자 2 – 242p.

남자가 남성성만으로 온전할 수 없듯이 여자들도 여성성 만으로 온전할 수는 없다. 남자는 남성성을 완성해야 하고 여자는 여성성을 완성해야 하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라고 말할 순 없다. 그래가지고는 피곤해서 살 수 없다. 남자에게도 여성성이 있고 여자에게도 남성성이 있게 마련이다. 남자와 여자가 서로 그것을 긍정해주는 삶이 아름다운 삶이다. ‘잘빠졌다’는 말은 공업적인 말이고, 더러운 말이다. 그 더러움은 사물성에서 온다. ‘잘빠졌다’는 말 속에서 잘빠진 여자는 소외된 여자다. 인간과 언어가 서로를 소외시키고 있다. 인간이, 인간이 아닌 것으로 바뀔 때 더러움이 발생한다. 아름다움의 내용을 억압과 사물성이 아니라, 자유로 가득 채우는 여자가 아름답다. 그런 여자가 살아 있는 여자고, 살아가는 여자고, 삶을 영위하는 여자다. 아들들아, 연애를 하려거든 그런 여자하고 해라.



# 여자 6 – 257p.

그림이 삶보다 더 아름다울 수는 있겠지만, 삶보다 더 무거울 수는 없을 터이다. 그러니 세월과 더불어, 세월의 풍화작용 속을 통과하며 살아가는 여자들의 젖가슴이 어찌 저 베레모 쓴 화백들의 절묘한 손놀림이 빚어내는 그림 속의 젖가슴과 같기를 바랄 수가 있겠는가. 하물며 여자의 여성성과 모성이 치러내야 하는 한평생의 생물학적 산전수전과 백병전 속에서 어찌 그림 속의 젖가슴이 온전하기를 바랄 수가 있겠는가. 삶은 풍화이며 견딤이며 또 늙음이다. 살아서 무엇을 이룬다는 일도 그 늙음과 견딤 속에서만 가능하다. 삶은 그림보다 무겁고, 그림보다 절박하고, 그림보다 힘들다. 그리고 삶은 그림보다 초라하다. 그림보다 꾀죄죄하고 그림과는 비교할 수 없이 훼손되어 있는 것이 삶의 올바른 풍경이다.



# 여자 7 – 262p.

사람의 목소리는 경험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추억을 끌어 당겨준다. 사람의 목소리에는 생명의 지문이 찍혀 있다. 이 지문은 떨림의 방식으로 몸에서 몸으로 직접 건너오는데, 이 건너옴을 관능이라고 말해도 무방하다. 그러므로 내가 너의 목소리를 들을 때, 나는 너를 경험하는 것이다.



# 길 – 299p.

길은 생로병사의 모습을 닮아 있다. 진행중인 한 시점이 모든 과정에 닿아 있고, 태어남 안에 이미 죽음과 병듦이 포함되어 있다. 길은 이곳과 저곳을 잇는 통로일 뿐 아니라 여기서부터 저기까지의 모든 구부러짐과 풍경을 거느린다. 길은 명사라기보다는 동사에 가깝다. 소백산맥을 넘어가는 문경새재는 산맥의 모습을 닮아 있고, 섬진강 하류를 따라 내려가는 19번 국도는 물을 닮아 있으며, 구부러진 논두렁길이나 밭두렁길은 그 흙에 코를 박고 일하는 인간의 노동을 닮아 있다.



# 고향 2 – 317p.

나는 고향이라는 어휘가 거느리는 정한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진화할 수 없는 비논리성이 그 정한의 바탕을 이루는 듯싶다. 나는 고향도 없고 타향도 없는 세상이 좋다. 고향이라든지 타향이라든지 하는 그런 어휘가 아예 없는 세상에서 나는 살고 싶다.



# 잎 – 361p.

다시 맞는 봄에 새잎이 돋는다. 봄에는, 몇 번의 봄이 더 남아 있을는지를 생각할 겨를이 없다. 봄에는 찰나의 덧없음에 미혹되는 한 미물로서 살아간다. 봄에는, 봄을 바라보는 일 이외에는 다른 짓을 할 시간이 없다. 지나가는 것들의 찬란함 앞에서 두 손은 늘 비어 있다. 나는 봄마다 속수무책으로 멍하니 바빴고, 올봄에도 역시 그러하다. 혼자서 늙어가는 내 초로의 봄날에 자전거를 타고 섬진강 물가를 달릴 적에, 새잎 돋는 산들이 물에 비치어 자전거는 하늘의 길을 달렸다. 아, 이 견디기 어려운 세상 속에는 또 다른 세상이 있었구나! 이 별 볼 일 없는 생애는 어찌 그리도 고단했던가. 땅 위의 길과 하늘의 길이 결국은 닿아 있었구나. 봄의 섬진강은 그런 미혹들이 바람에 실려서 불어왔다. 이쪽 길로 가자니 저쪽 길이 아까웠고, 저쪽 길로 가자니 또 그 너머의 길이 궁금해서 자전거는 갈 길을 정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굴러갔다.



# 작가의 말 - 410~411p.

보낼 스스로 그러한 것들을 향하여 나는 오랫동안 중언부언하였다. 나는 쓸 수 없는 것들을 쓸 수 있는 것으로 잘못 알고 헛된 것들을 지껄였다. 간절해서 쓴 것들도 모두 시간에 쓸려서 바래고 말하고자 하는 것은 늘 말 밖에 있었다. 지극한 말은, 말의 굴레를 벗어난 곳에서 태어나는 것이리라.


이제, 함부로 내보낸 말과 글을 뉘우치는 일을 여생의 과업으로 삼되, 뉘우쳐도 돌이킬 수 없으니 슬프고 누추하다. 나는 사물과 직접 마주 대하려 한다.


2015년 여름은 화탕지옥 속의 아비규환이었다. 덥고 또 더워서 나는 나무그늘에서 겨우 견디었다. 그 여름이 가고, 가을이 또 와서 숙살(肅殺)의 서늘함이 칼처럼 무섭다.

낮고 순한 말로 이 세상에 말을 걸고 싶은 소망으로 몇 편의 글을 겨우 추려서 이 책을 엮는데, 또하나의 장애물을 만드는 것이 아닌지를 나는 걱정한다.



<라면을 끓이며>

김훈 지음

문학동네, 2015


라면을 끓이며
국내도서
저자 : 김훈
출판 : 문학동네 2015.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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